3월 30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이 동방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토요일 산행이 숨쉬듯이 자연스러워서 마냥 출근하듯 집을 나섭니다. 오늘로 4번째 산행인데, 비로소 3월 한달이 지났음을 알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저것 적응하려고 많이 애를 쓴 것 같은데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자문해보니, 그냥 기타 실력 조금 늘었고, 산악부나 노래나래 사람들 만나면 그저 웃음이 나고, 쌓여가는 즐거운 추억들에 약간 웃상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네요.
취미를 만들고, 그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인 것 같습니다. 케네디의 말처럼 소속 집단에 뭔가를 바라기보담, 내가 구성원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오늘도 모처럼 들뜬 기분에 오렌지를 썰어 넣고, 계란을 삶으며, 커피를 끓였습니다. 과정에 대한 의심이 별로 없습니다. 묵묵하지만 차분한 분위기 속 아침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통근시간 지하철에서 틈틈이 미드를 챙겨 보는데요, 이게 참 킬링타임으론 제격입니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라는 작품인데, 작중 인물이 무대에서 갑자기 BTS의 다이너마이트를 기깔나게 불러 제끼는 바람에 눈과 귀를 의심했습니다. 보통 시즌 1이 흥하면 그 다음 시즌은 재미가 덜한 경우가 많은데, 요건 서사가 잔잔하니 굴곡이 적어서 계속 보게 되더라구요. 아직 오늘 같은 어제, 7호선을 타고 이수에서 공릉으로 가는 길에 요긴하게 잘 봤습니다.
요즘은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기분을 종종 느낍니다. 지하철로 불암산 가는 도중 반포와 뚝섬, 그리고 면목을 지났습니다. 고등학교는 반포에서 다녔고, 할아버지께서 뚝섬을 자주 오가셨으며, 면목동 이모할머니는 놀러 오실 때마다 손자들 간식을 많이 사주셨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기분이 다운되는 일이 잦았는데, 이젠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안팎으로 재미있는 이벤트가 많아서 그런가봐요.
공릉역에서 내려 빌딩 숲과 아파트 단지를 지나 지도를 보며 한 15분 정도를 걸었습니다. 백세문 앞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길 건너편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왕복 8차선 도로여서 그런지 신호가 길어서 기다리는 동안 약간 뻘쭘했습니다. 백세문은 생각보다 스케일이 웅장했습니다. 옆 정류장에서 도원이 옆에 앉았더니 엉덩이가 따뜻해서 놀랐습니다. 정류장 의자에도 엉따 옵션을 넣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지요.
한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다른 부원들이 속속들이 도착했습니다. 다들 새벽같이 준비하고 나오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의외로 밝고 명랑해 보였습니다. 영인이가 숙련된 조교 바이브로 체조를 하길래 지원, 민경과 약수터 아재 빙의해서 열심히 따라하며 스트레칭을 했습니다. 별 거 아닌데 되게 시원하더라구요. 목 한바퀴, 허리도 한바퀴, 고관절도 슥 둘러 풀어주고. 다수 인원이 집결하자 입구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오늘의 러닝메이트는 도원이였습니다. 중외통 스터디의 화제로 시작해서 붕어빵은 팥이냐, 슈크림이냐의 밸런스게임, 빼놓을 수 없는 군대간 동생 놀리기 등 다양한 주제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아인이랑 같은 과인 태현이와도 처음 만났습니다. 다단계에 당했다고 합니다. 이 친구 뭔가 운동좀 할 것 같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축구를 한답니다. 포지션은 윙이라고 합디다. 반가운 마음에 아무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는데, 묵묵히 잘 받아줘서 고마웠습니다.
근데 도원이를 계속 따라가다 보니 뭔가 이상합니다. 분명히 걸음은 빠른데, 뭔가 자꾸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합니다. 없는 길도 만들어서 가는 느낌입니다. 듣자하니 다른 산에서도 미지의 경로를 개척해낸 화려한 전적이 있더라구요. 불암산 중턱에 헬기장이 있다는 도원이 말을 철석같이 믿고 빠른 페이스로 올라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정상이었습니다. 뉴비 조련하는 실력이 찐 산악부입니다.
정상에 올라가니, 도원이만 이상한게 아니라 날씨도 이상합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던데,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치고 칼바람이 매섭게 들이닥쳤습니다. 올라가는 길에 살짝 더워지고 땀이 나려 했는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너무 추워서 뜨끈한 커피 한잔이 간절하더라구요. 사람이 많은 관계로 자리가 여의치 않아서, 뒷사람들 기다렸다가 단체사진을 한방 찍고 다음 코스로 넘어갔습니다.
불암산 정상에서 수락산 쪽으로 넘어가는 길은 정말 익스트림했습니다. 아니, 순식간에 사방이 설산이 되어버렸다니까요? 진눈깨비도 아닌 찐눈입니다. 실시간으로 눈이 쌓여가는 걸 두 눈으로 봤습니다. 대장도 위험하다 판단했는지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민경이는 선글라스를 끼니까 바로 Veronica 모드입니다. 중간에 태현이랑 상택이에게 농담조로 히말라야의 황정민 빙의해서 ‘그 동안 즐거웠다, 제군들’ 이라 말했던게 기억납니다.
아침에 별 생각 없이 패딩을 입고 나온 나 자신을 칭찬했습니다. 예진님은 머리에 눈발이 쌓이니까 마치 백발처럼 보였습니다. 돌아가는 길도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단체로 유사 암벽등반을 해야만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빠 믿지? 하고 자신있게 올라갔는데 알고보니 뒤를 받쳐준 승혁이와 지운이가 진짜 오빠였습니다. 원래 저는 호들갑 전문입니다. 물에 들어가면 입만 둥둥 뜨는데 산에서도 마찬가지였네요. 그 악천후 속에서 최단 루트를 찾아낸 산악부도 칭찬해.
반나절도 안됬는데 거진 한나절 산행한 것처럼 기력이 소진됬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다들 출출했는지 앞에서는 순대국 얘기, 뒤에서는 마라탕 얘기를 하니 배에서 꼬로록 소리가 나더군요. 다들 식사가 든 배낭은 열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하산했습니다. 외대앞 신의주 순대국에서 식사를 하고 동방에 들렀다 가는 걸로 노선을 정한 것 같아요. 지원이가 아침부터 그렇게 순대국엔 소주지, 하고 노래를 부르더니 dreams come true.
이건 오프 더 레코드인데, 외대앞 역 가는 길에 예진, 보영 님, 다은, 승혁이 등과 지하철에서 찜질방 얘기를 했습니다. 때를 미는 것이 좋은가? 부터 시작해서 세신의 디테일, 휘경동 인삼 사우나 그리고 운동 후 반신욕의 효과까지. 다들 운동 후에 하는 반신욕이 피로 해소와 근육통 경감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본인도 최근에 일본으로 온천 여행을 다녀온 이후 불면증이 깨끗이 치료된 경험이 있어서 일견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역에 내려 국밥집에 도착하니, 거짓말같이 눈이 뚝 그쳤습니다. 마침 메뉴에 쭈꾸미가 있어서 비빔밥도 시키고, 얼큰한 순대국과 함께 소맥 한잔을 걸치니 몸이 끝도없이 노곤해지더라고요. 쌀쌀한 바깥 공기에 이클립스 한알 문채 걸으며 잠을 깨긴 했지만… 생각보다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모양인지 동방 안에서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앉는 건 참기가 어렵습디다. 상택이는 자연스럽게 매트리스 위에 기절해버렸구요.
(윤)지원이가 기타를 좀 쳐달라고 멍석을 깔아줬는데, 내심 고마웠습니다. 사람도 많은데 밑도끝도 없이 기타 꺼내서 치기도 민망하잖아요. 피곤하다고 밑밥을 깔긴 했지만 원체 기타 치는 걸 좋아하는 지라 가져온 악보를 펼쳐놓고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을 연주했습니다. 사실 연주라고 하기엔 아직 2달 배운 초보라서 좀 미숙하기는 한데, 튜닝을 하니 소리는 그럭저럭 들어줄~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진심입니다.
중간에 트레일 러닝을 마치고 온 건하와 최근에 다리 부상을 입은 정윤이도 합류했는데, 이 둘의 케미가 압권입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관계는 처음 봤어요. 아주 친한 것 같은데, 약간 애증(?)의 관계인 것 같기도 합니다. 중간에 정윤이가 급식실 덩치 발언 썰을 꺼낼 때 서운했던 마음이 느껴지는데 얘기 자체는 너무 웃겨서 말그대로 웃프더라고요. 그 뒤로도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는데 팝콘 생각이 날 정도였습니다.
소파에 누웠다가~ 자리를 옮겨서 앉아봤다가~ 틈틈이 가는 사람들 배웅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참 신기한게 이제 동방이 안방처럼 편하더라고요.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가 봅니다. 학교 계정 비번도 못외우는데 동방 비번은 찰떡같이 외워요. 익숙한 공간에 낯익은 사람들, 떠들썩하지만 시끄럽지 않고 훈훈하지만 낯설지 않은 적당한 온기. 그 매력에 푹 빠져서 머리맡을 기대고 어렴풋이 졸았던 것 같습니다.
동방 기타가 좀 오래된 것 같아서 집에 가져와 난생 처음으로 기타 줄도 갈아봤습니다. 매일 무뚝뚝하게 내려치기만 하던 악기인데 직접 분해 조립하며 속알맹이를 보니 뭔가 낯설기도 했지만, 차근차근 줄을 감고 튜닝해서 외관과 소리가 나아지는 걸 보니까 뭔가 애착이 생기더라고요. 힘들게 집까지 들고온 보람이 있다 싶었습니다. 편한 길만 택하는 게 정답은 아닌가봐요. 뜸들이는 경험을 하고 나니 사람도, 기타도 더 좋아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