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 모름지기 허튼 걸음을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마침내 후인의 길이 되리니.
– 서산대사, <눈길을 걸을 때>

혹자는 체육대회가 산에서 열린 것도 아닌데 무슨 산행기야? 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천만에, 체육대회에 참여한 산악부 인원들 모두의 마음 속에 산이 있고 바위가 있음을 알기에, 크고 작은 산들끼리 함께한 이번 활동이 그 여느 때보다도 더욱 산스러웠다고 본다. 흙과 바위가 모여 산길이 되고 선인의 발자취가 모여 능선과 봉우리가 되듯이, 금번 대회는 OB 형님들과 YB 재학생들이 만나 이뤄낸 외대산맥의 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각 팀 이름도 인수봉과 선인봉이 되었을지도~ ㅎㅎ


대회 식순은 오전) 개회식 – 축구 – 발야구 – 피구 / 오후) 중식 & 부실 관람 – 이어달리기 – 폐회식 – 뒷풀이 순이었다. 홀수팀 선인봉과 짝수팀 인수봉이 매칭되자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텐션 걸린 도봉산과 바위처럼 단단한 북한산의 대결… 가슴이 웅장해진다. 첫 경기인 축구는 전, 후반 각 15분씩 총 30분으로 진행됬는데 아무래도 체력전이었다. 약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와 고무가 찰박이며 튀는 잔디구장에서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던 와중,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선인봉의 혜선이가 골을 넣을거라고! 수비의 공백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파고드는 게,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말이 어울렸다.


이어서 진행된 발야구 경기에서 정윤이의 리더십을 가감없이 느낄 수 있었다. 낙성대공원에 산책하러 가면 안국사를 들리는데 혹시 정윤이가 강감찬 장군의 환생인가 싶다. 물샐 틈 없이 치밀하게 짜여진 수비라인(공샐 틈은 있음)과 잊을 만하면 재개되는 작전타임, 거기에 수시로 쏘아대는 묵직한 2루타급 거포… 장군감이야~ 발야구가 이렇게 긴박하고 짜릿한 스포츠인 줄 처음 알았다. 지원이가 북한이었으면 미사일 쐈을 거라는데 자연스레 수긍하게 되더라. 축구는 1:0, 발야구는 무려 18:17로 1점차 승부! 수비도 바위처럼 단단한 인수봉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모두가 공 앞에서 하나되어 친해지는 시간, 바로 3번째 경기인 토모-다찌볼이다. 승리를 위해선 공경보단 최선의 수비인 공격! 하지만 OB 형님들도 역시 만만치 않다. 다년간 산행과 등반으로 단련된 코어 근육과 전완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의 스파이크에 다들 오금이 저렸다고 한다. 그런고로 본인은 얌생이처럼 요리조리 피하는데 주력했다. 그 와중에 정윤이는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스나이핑 실력이 장난 아니다. 진심으로 같은 팀이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민석이 형과 범학이 형이 든든하게 버텨주신 덕분에 인수봉이 또 한번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인수봉 : 선인봉 = 2 : 1!


오늘의 잿밥은 너무나 풍성했다. 상욱 형이 준비해오신 따뜻한 안흥 찐빵과 경희 형의 정성이 듬뿍 담긴 홍어 삼합, 그리고 두헌이가 좋아하는 랜덤… 아니 해남 막걸리까지. 백년관 앞 공터에 급조된 한식 뷔페에서 제공된 풀코스에 압도적 감사.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을 거르고 오는 건데. 추가로 시켜주신 통닭과 김밥까지도 참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오르자 산, 마시자 술, 나누자 정! 산술정이 차고 넘치는 복작복작한 여느 5월의 점심, 행복하시죠? 산악부에 숟가락 얹길 잘했다. 옆 건물에서 열심히 일하던 고모(고아인 + 창모) 에게도 수박 한조각 갖다주었다.


왕산 부실은 처음 가봤는데, 사실 동방보단 가는 길이 더 좋았다. 캠퍼스 내에 솔숲길도 있고 졸졸 소리내며 다리 밑으로 시냇물이 흐르는 게 완전 컨트리 로드. 그래도 고라니는 안 나오겠지, 도원아?! 동방 내에 실내 암벽장이 있어서, 잠깐 매달려봤는데 코스가 상급자 용인듯. 그 와중에도 건하는 여심바위 코로나 때처럼 천장에 매달려 있다. 당신을 산악부 공식 매미로 임명함. 미희 형께서 1갑자 내공을 발휘하시곤 마치 볼더링 선수처럼 역동적으로 추락하셨다. 올라가는 길 동수 형과 산에 대해 적잖은 얘기를 나눴다. 형님, 그래도 의 상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상한 게 낫지 않을까요?


잠시 간의 휴식을 마치고 대망의 2부 이어달리기가 시작되었다. 대략적인 순서는 코끼리 코 – 제기 차기 – 2인 3각 – 자일 사리기 순이었던 것 같다. 어쩌다보니 (김)지원이랑 한 팀으로 코끼리 코를 돌게 됬는데, 10년 만에 돌려니까 역시 사소하지만 생소해. 상대 팀이었던 태유형은 진짜 잘 뛰시더라. 반바퀴 돌 때 이미 한바퀴 도심. 2인 3각은 끝판에 가니 다들 맘이 급해선지 줄이 풀리고 넘어지는 등 난리 부르스였다. 자일 사리기 할 때 상대 팀이 슬쩍 한 두명씩 와서 겐세이를 놓는게 백미였다. 특히 홍현이가 자연스러워서 개 얄미웠음 ㅋㅋ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자일 아조씨, 신지운!


우리 산악부는 성비가 별 의미가 없다. 왜냐면 여자들이 더 세기 때문이다. 설마 강일이 형이 앞에서 한 5인분을 하신 건 아니겠지?! 암벽 등반할 때 하네스에 걸린 자일에서 느껴지는 텐션과는 사뭇 다르다. 두 손 모아 자일을 잡고 다소곳이 누웠을 뿐인데 상대 팀의 거센 저항에 앞으로 튕겨 나가듯 고꾸라지면서 영혼까지 빨려 나갈 뻔했다. 낙승을 예상했는데 처참하게 졌다. 걸크러시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앞으로 넘어졌는데도 코가 깨지지 않은 걸 보니, 그래도 재수는 있었구만. 선인봉의 완승!


우수 선수 시상과 폐회식 절차를 마치고, 인근 맥줏집으로 뒷풀이를 왔다. 동연이 형 주관으로 저학번부터 고학번까지 돌아가며 소감을 얘기한 후 아득가, 설악가와 자일의 정과 같은 산노래도 불렀다. 혁준이 차례였던가, 산악부가 어려운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살려놓은 불씨가 작금에 이르러 힘차게 살아나는 것을 보고 뿌듯하다길래 마음이 뭔가 짠했다. 옆자리에 앉았던 승민이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외대 산악부의 역사가 긍정적으로 이어져서 참 다행스럽고, 본인도 숟가락 얹은 김에 덕만 볼게 아니라 기여를 하리라고 다짐했다. 그 와중에 보영, 예진 님 염통꼬치 넘나 잘 드심.

천, 지, 인이라고 했던가. 산에 가면 말간 하늘도 보이고, 김동률이 출발에서 노래한 촉촉한 땅바닥과 앞서간 발자국도 느껴진다. 그치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가는 동료인 것 같다. 우리는 산으로 모였지만 길을 걷는 과정에서 점차 산을 닮아가는 듯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던데, 산악부의 배는 과연 어디로 갈까? 동수 형은 등산하는 사람들이 이상(strange)하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감히 이상(理想)을 말하고 싶다. 성경 말씀처럼, 우리 YB들 또한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할 수 있다. 산행은 현재를 아름답게 살아가는 연습이니까.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For You

One Comment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